[인터뷰] Mr.335 래리 칼튼 (Larry Carlton)과의 수다

2009. 4. 22. 16:43음악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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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 세션에서 부터 재즈 영웅까지, 래리 칼튼(Larry Carlton) 그는 모든 것을 다 하고있다. 그 만큼이나 그의 기타가 유명한 사람과 인터뷰를 시작한다.

  래리 칼튼은 우리 시대에 가장 많은 다작을(多作, prolific) 하는 기타 연주자 중 하나이다. 이 다작(多作)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래리는 진정으로 이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래리는 매번 새로운 분야를 정복하고 또 다시 이름을 날릴 새 기회를 찾는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이나 스틸리 댄(Steely Dan) 등과 함께한 3000번 이상의 세션 활동, 세계적으로 성공한 솔로 활동, 상업적인 일들과 'The Crusaders' 와 'Fourplay' 같은 그룹 활동까지 그는 모든 것을 다 해왔다. 최근 래리는 새로운 레코드 레이블인 '335 레코드'를 시작했으며 온라인 TV스테이션 'Mr. 335 TV' 도 시작했다. 우리는 Mr.335와 함께 그가 시작한 새로운 사업들과 그가 새롭게 찾은 자유 그리고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기타는 언제 시작하게 되었나요?

  아, 내가 기타를 시작한 것은 여섯 살 때부터였어요. 어머니께서 십대시절 기타를 치셨었죠. 그래서 집에 오래된 어쿠스틱 기타가 하나 놓여있었는데 부모님께서 말씀해주시길 내가 네 살 때부터 그 기타에 관심을 가졌다고 해요. 그러나 기타를 치기에는 너무 어렸죠. 부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었는데 " 니가 기타를 잡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되면 기타를 배우게 해줄께" 그래서 여섯살 부터 기타를 배우게 됐어요. 나는 한 선생님에게서 8년동안 기타를 배웠는데 나중에 그 선생님이 부모님께 말을 했죠. " 이제 저는 더이상 가르칠게 없어요. 우리는 맨날 같은 것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섯살이면 기타를 시작하기에는 매우 어린나이였는데,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그분의 성함은 Slim Edwards였죠. 그를 회상할 때면 감사하게 되는 것이 많아요. 난 그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악보를 보고 연주에 집중할 수 있는 집중력이 어느 정도 철이 든 아이들 보다 부족했어요. 그래서 30분의 레슨 시간 동안 처음 10분은 에드워즈와 그냥 잼 연주를 했어요. 아주 짧고 간단한 부기우기 같은 것들, 발로 박자를 세며 재미있게 했죠. 그리고 그 후의 20분 동안 스케일이나 코드, 악보 읽는 것등을 배웠어요. 나는 Slim이 나를 인도했던 방식이 나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해요. 기타의 테크닉적인 부분을 추구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해주었죠. 나는 매일 최소 30분씩 연습을 했어요. 당신이 8살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그건 도를 닦는 거였어요. 왜냐면 야구도 할 수 있고 여자애들 하고도 놀고 그 외에도 남자애들이 할 수 있는 많은 다른 것들이 있잖아요. 그렇게 연습을 했던건 부모님의 영향이 큰데 종종 내가 연습에 집중하도록 시키셨어요. 나는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연습하기는 싫어했지요. 그러면 부모님은 " 래리야, 들어와서 기타연습하렴" 하고 말하셨죠. 그렇게 시키셨던 것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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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에는 어떻게 발을 들여놓게 되었나요?

  14살즈음 난 어느날 집에서 위대한 재즈 기타리스트인 Joe Pass의 연주를 처음 듣게 되었어요. 그것이 연주자로서의 내 인생을 바꿔놓았죠. 난 그처럼 되고 싶었어요. 부모님과 나가서 그가 연주한 레코드들을 주문했지요. 2주후에 받아볼 수 있었는데 재즈를 향한 내 열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어요. 나는 그 솔로들을 배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기타를 맨체 열심히 앉아서 레코드 앨범을 따라했죠. 난 악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귀로만 듣고 따라 했어요. 난 이런식으로 내 귀를 훈련시켰죠. 십대를 지나는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도 서프 밴드와 재즈 트리오, 팝밴드 등에서 연주를 했었죠.


젊은 연주자로서 주목받을 수 밖에 없었을 텐데요?

  음, 6살때부터 16살까지 난 내가 하는 것에 대해 꽤 소질을 보이는 꼬마였어요. 많은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졌는데 그건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죠. 그런 관심이 10대 시절 내내 계속 되었죠. 내가 클럽에서 연주를 할 때면 (식사를 할 수 있는 클럽, 술집에 가기는 너무 어렸다.) 사람들은 주목을 했지요. 내가 연주를 시작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 꼬마 연주하는 것 들어봤어?" 이 이야기는 남부 캘리포니아와 로스앤젤레스의 다른 지역에도 퍼졌죠.

  16-17살 즈음인가 난 갑자기 데모 세션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죠. 난 드물게도 작은 클럽에서 연주하다가 바로 스튜디오로 진출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18살에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일이 있었죠.  Los Angeles의 April Blackwood Music Publishing 에서 데모 녹음을 위한 기타 연주를 제의 받았죠. 이 데모를 작업하고 몇주 후 난 결국 편곡자가 되었어요. 왜냐면 난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에 빠져있었거든요. 다시 한 번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평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죠. 이게 점차 커지더니 결국 큰 세션으로부터 제의를 받게 되었어요. 이때즘 난 20살이었고 내가 연주를 잘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고 있었죠.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는 시기는 언제인가요?

  67년에 난 남부 캘리포니아 San Pedro에 있는 Harbor Junior College의 1학년이었어요. 음악 전공이었죠. 난 재즈 콘서트에 참여하게되었고 내가 있던 작은 재즈 트리오가 주역을 맡았었는데 우연히 레코드 프로듀서가 거기에 있었던 거에요. 그의 이름은 Harry Mitchell, 그는 일류 프로듀서는 아니었지만 음악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었죠. 그는 다가와서 자신을 소개하더니 나에게 앨범 낼 생각 없냐고 묻더군요. 물론 난 하겠다고 했죠. 그리고 내 첫 앨범이 68년에 나왔어요. 난 기본적으로 Wes Montgomery를 따라했어요. 물론 그만큼 잘하지는 못했죠. 그렇지만 나에게는 나를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에서 표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그 앨범이 나오고나서 그해 여름 남부 캘리포니아의 재즈 클럽에서는 자주 그 노래가 흘러나왔죠.

  그러는 동안 난 자신을  Ford의 광고를 만드는 프로듀서라고 소개한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았어요. 그들은 'The Going Thing' 으로 불리는 촬영팀이 있었어요. 광고의 멘트가 "Ford has a better idea, it’s the Going Thing!" 였거든요. 그들은 내가 그 그룹에 합류해서 일단 이 광고를 녹음한 다음에 여름동안 그들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는지 물어왔어요. 난 결정을 내려야만 했죠. 2번째 앨범을 만드느냐 아니면 이 그룹에 합류하느냐. 난 그룹에 합류하는 것을 선택했어요. 그리고 스튜디오 뮤지션들을 만나기 시작했죠. 이전처럼 스튜디오 뮤지션들이 내 연주를 듣고는 그 소문이 퍼졌고 난 세션업계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내가 “The Going Thing” Ford 를 택하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20살 이후 에는 재즈 솔로 연주자로 끝이 났을 거에요. 난 내가 내렸던 결정에 대해서 매우 만족해요. 스튜디오에 있으면서 매일 훌륭한 뮤지션들과 같이 연주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이 나의 음악적 역량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줬어요. 내가 다른 방식을 취했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세션일은 얼마나 오래 하셨죠?

  난 23살에 시작을 해서 7년동안 스튜디오 뮤지션이었어요. 1970년에서 1977년 까지. 난 일주일에 평균 15-16프로(1프로-3시간)를 7년간 했지요. 이시기에 3000회 이상의 레코딩 세션을 했고 그 당시의 유명한 스타들과 작업을 할 수 있었던 행운을 누렸어요. Barbara Streisand, Michael Jackson, Joni Mitchell, Steely Dan, David Cassidy 그리고 the Partridge Family 등등. Crusaders와도 13장의 앨범을 작업했죠. 그런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난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난 내가 같이 연주한 뮤지션들로 부터 많이 배웠어요. 생각해봐요. 난 23살이었고 Crusaders의 Joe Sample와 연주를 했죠. 그런 영향들이 이후의 내 삶에 음악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아주 멋진 경험이었죠. 내 인생에서 세션활동 기간은 참 특별하다고 할 수 있죠.   


수 많은 훌륭한 뮤지션들과 작업을 하면서 당신이 얻은 잊지 못할 충고나 조언 같은 것이 있나요?

  Louis Shelton -내 생각에 그 시대에 가장 맛깔나게 기타를 연주했던- 이 어떤 레코드를 녹음하고, 난 그것이 믹스된 후에 라디오에서 듣게 되었어요. 그의 기타는 보컬리스트와 함께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전면에 배치되어 들렸죠. 난 많은 세션 연주를 했지만 내 기타는 언제나 트랙의 제일 뒷쪽에 믹스가 되었었고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어요. 어느날 난 세션 타임 사이에 Louis Shelton와 함께 Sunset Boulevard 를 걷다가 물어봤죠. "루, 왜 그들은 레코딩에서 당신은 그렇게 두드러지게 믹스를 하고 난 그렇지 않게 하는 걸까요?" 그가 대답했어요. "래리, 난 편곡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해.(I try to think like an arranger.)" 그 순간이 내게 번쩍하는 순간이었죠. 난 늘 기타 연주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왔었으니까요. 


335는 언제 부터 쓰게 된건가요?

  래리 칼튼과 ES-335의 로맨스는 69년에 시작되었죠. 난 세션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스튜디오에서 스튜디오로 분주하게 다니던 때였어요. 그렇지만 난 내가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해야 할지 알 지 못했죠. 난 재즈를 사랑해요. 난 락큰롤도 연주할 수 있고 컨트리도 연주할 수 있죠. 그래서 난 이 모든 것들을 다 소화할 수 있는 기타를 찾았어요. 내가 연주자로서 그랬던 것처럼 다재다능한 기타가 필요했죠. 몇가지를 사용해 본 후 난 깁슨 ES-335가 나에게 맞는 기타라고 생각했죠. 재즈 스타일 연주도 가능하지만- 난 재즈를 좋아하고 F홀과 세미할로우 바디의 소리를 좋아해요.- 트레블 픽업으로 놓았을 땐 앰프에서 질러대는 소리(scream)를 들을 수 있죠. 다재다능함 혹은 범용성. 이것이 이 기타를 선택한 이유에요.


세션으로서 당신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내 세션활동이 계속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겠죠. 난 어떤 프로듀서와 한 번 일을 하면 그가 다음 번에 일을 할 때 나에게 연락해서 다시 세션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난 그렇게 나를 다시 부르는 이유가 내가 가진 범용성(다재다능함)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태어나고 기타를 연주하던 시기는 매우 특별한 시대였죠. 6살이던 50년대 후반, 나는 라디오에서 '두왑' 을 들으면서 자랐어요. 내가 기타를 공부하던 60년대 초에는 대중음악으로서 락큰롤이 시작되던 때였죠. 예를 들면 64년의 비틀즈. 난 그렇게 재즈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던 시기에 이런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죠. 내가 20대가 되어 성숙해졌을 때 난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섭렵했었고 그것을 스튜디오 씬으로 가져갈 수 있었죠.  그것이 내가 세션 활동을 잘 할 수 있게 한 가장 큰 재산이었다고 생각해요. 다양성이 바로 내 무기죠.

  70년대로 가면서 스튜디오에는 두 종류의 기타 연주자가 존재했어요. 한쪽은 어떤 악보든지 보고 칠 수 있는 젠틀맨 스타일의 연주자인데 그들은 락큰롤을 듣거나 하지 않았죠. 다른 한편은 지미헨드릭스나 에릭 클랩튼을 듣는 부류들이었고 그들은 불꽃같은 연주를 할 수 있었지만 주는대로 연주하는 것을 하지 못했죠. 그들은 다양성(융통성)이 없었어요. 내가 그 업계에 들어섰을 때, 난 내가 자라온 시대 덕분에 양쪽 모두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던 첫번째 사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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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일은 언제 그만 두셨나요?

  내 세션 활동의 마지막 2년동안 난 레코드의 편곡자로도 활동했어요. 난 Barbara Streisand, Joan Baez, 그외 많은 사람들의 곡을 편곡했죠. 난 그것이 즐거웠는데 왜냐면 그 때 기타는 엄청나게 연주해대고 있던터라 기타치는 것 말고 다른 파트를 쓰고 세션을 이끄는 것이 좋았어요. 스튜디오 기타연주자에서 스튜디오 편곡자로 변화하고 있었죠.

  1977년에 난 다른 변화를 가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느꼈어요. 그것은 레코드를 프로듀서가 되는 것이었죠. 나는 기타리스트로서 모든 세션 활동을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프로듀싱만 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시기에 난 지역의 재즈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는데 더이상은 세션활동으로 바쁠 일이 없었기 때문이죠.  재즈 클럽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동안 CBS 레코드사에서 내 연주를 듣고는 담당자가 내게 와서 이야기를 했죠. " 혹시 솔로 앨범 낼 생각 없나요?" 그랬던거죠. 난 있어야 할 시기에 제대로 된 곳에 있었던 거였어요. 거기서부터 내 솔로 활동이 시작되었죠.  

  CBS는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당신과 계약을 하고 싶지만 당신을 프로듀스할 프로듀서가 필요하다." 난 내가 직접해서 실패하기 전까지는 스스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누가 나한테 이렇게 저렇게 연주하라고 하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난 밀어붙이기로 했고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 했죠. " 싫다. 난 내가 직접 프로듀싱 할거다.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그때는 당신들과 함께 해보겠다." 그들은 안된다고 이야기 했죠. 그래서 나는 데모 하나를 챙겨서 그것을 Warner Bros로 보냈죠. 대답은 "당신 뜻대로 하세요" 그래서 난 나만의 스튜디오에서 내 스스로 프로듀싱을 했고 그 이후로 스스로 프로듀싱을 해오고 있어요.


솔로 활동에 대해서도 조금 얘기해주세요.

  1971년에 난 'Larry Carlton' 앨범을 냈어요. Warner Bros에서 처음이죠. 앨범은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어요. 난 일본에 가서 공연도 했어요. 79년에 'Larry Carlton'앨범이 나오고 80년에 Hill Street Blues 의 텔레비전 테마로 Mike Post와 함께 첫번째 그래미 상을 타게 되었죠.

  84년까지 난 Warner Bros에 있었죠. 그리고 'Friends'라고 이름붙인 앨범을 내기로 결심을 했죠. 그래서 내 친구들을 불러다가 같이 연주를 했어요. David Sanborn, Michael Brecker, Joe Sample, B.B. King, Al Jarreau, Jeff Porcaro, Abe Laboriel. 난 음악적으로 내가 만들 수 있는 기회와 선택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어요. Friends 앨범은 큰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렇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었어요. Warner Bros의 대표가 날 불러다 이야기 하더군요. "래리, 당신 때문은 아니지만 우리는 85년부터 재즈 부분에서 손을 떼기로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보내주려고요. 이제 당신은 자유입니다."

  2년동안은 난 레코드 계약을 하지 않아야 겠다고 결심했어요. 난 좀 한가하게 기타를 연주하고 싶었죠. 그때 오랜 프로듀서 친구인 Jimmy Bowen,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그와 Tony Brown이 86년에 MCA Master Series라는 레이블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나보고 와서 작은 부티크 앨범을 녹음해 줄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내가 전에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것이었지요. 난 그전에 어쿠스틱 기타 앨범을 작업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난 그리로 가서 'Alone or Never Alone' 앨범 작업을 했지요. 'Smiles and Smiles to Go'는 그 앨범에 있는 곡인데 나에게는 대표곡이 되었죠. 계속 작업을 해서 다음 해인 87년에 Discovery 앨범을 발표했고 'Minute by Minute' 그래미 퍼포먼스 부문 상을 수상했지요. Michael McDonald, Kirk Whalum이 같이 연주를 했어요. 내 솔로 활동은 계속 진행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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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80년대 후반에 사고를 당한적이 있지요. 실례가 안된다면 이야기 해주실 수 있나요?

  88년 4월 난 Hollywood Hills에 있는 내 레코딩 스튜디오에 있었어요. 난 사무실에 있었는데 사무실의 문은 길거리로 나있었고 문이 조금 열려있었어요. 난 밖에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는데 두 젊은이가 조깅을 하고 있었고 독일산 셰퍼드가 그들과 함께 뛰고 있었죠. 그래서 난 그 개가 사무실로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으려고 나갔어요. 내가 문에 다가가서 닫으려고 하는 순간 난 그냥 문을 닫으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젊은이 중 한명이 나한테서 20피트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등뒤에서 총을 꺼내더니 한발을 발사했고 목부분에 맞았어요.

  총알은 내 경동맥을 끊고 내 성대 왼쪽을 날려버렸죠. 그래서 난 지금 한쪽 성대만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총알이 내 등에 박혀서 내 왼쪽팔의 모든 신경에 상처를 주었죠. 다행히도 큰 수술과 몇달간의 재활을 통해서 내 왼쪽 팔에서 손가락까지의 신경들은 회복되었어요. 그 6-8개월 동안 난 내 왼쪽팔을 쓸 수가 없었죠. 난 치약조차 짤 수도 없었죠. 오른팔을 이용해서 왼팔을 움직여야 했고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었어요. 재활을 위해 물리치료로 신경을 자극했고 결국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죠.

  기타를 칠 수 없게 된지 7달쯤 지난 후에야 감각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난 집에 작은 어쿠스틱 기타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날 저녁 난 그 기타를 뜯으며 기본적인 코드를 집을 수 있었어요. 신이 내 왼손의 신경에 축복을 내려주신거였죠. 그리고 근육을 다시 살릴 때가 온거였어요. 난 모든 물리치료를 동원해서 내 손에 근육을 길렀고 그래서 다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죠. 1988년 12월인 것 같은데 내 친구들이 모여서 내가 다시 기타를 칠 수 있게 된것을 축하하는 콘서트를 즐겼던 것 같아요.
   

피격의 영향은 당신의 연주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총격을 당한 비극을 겪게 되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죠.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어요. '오, 난 새로운 사람이 됐어. 총격을 통해 방금 만들어졌지!' 이런식으로 확 드러난 것이 아니었어요. 그건 대화를 통해 드러나게 됐죠.

  특별히 기억나는 대화는 내 아들인 Travis와 했던 거였는데 그때 그애가 다섯살이였죠. 그때 나는 상태가 좋은 편이었어요. 치료를 잘 받고 있었죠. 그애랑 대화를 하게 됐는데 그애가 말했어요. "아빠, 그 사람들이 왜 아빠를 쏜거에요?" 그리고 내 생각에 진실이란 것은 어린이와 함께할 때 찾게되는 것 같아요. 그 순간에 내 머리를 스치며 내 입으로 나온 말은 "트래비스, 아빠는 아닐 것 같애? 아빠도 그저 평범한 아빠일 뿐이란다." 그말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비록 내가 기타를 연주하는 데에는 재능을 타고났지만 기타를 내려 놓고 그냥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나를 이해해보면, 난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었죠. 그저 기타를 칠 줄 아는. 총상을 입고 회복한 이후로 사람들은 제 기타연주하는 방식의 변화를 보게되었죠. 그들은 심지어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들어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열정 혹은 감정적인 것이죠. 내가 솔로를 연주한 후나 쇼가 끝난 뒤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말을 해요. "난 당신이 이렇게 기타를 연주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어요". 그런 감정적인 것들은 래리칼튼이라는 뮤지션의 깊숙한 내면에서 나온 것이었죠. 그렇게 한번 깨닫고 나니 난 연주자로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맞아요. 총상을 입고 회복된 후 난 다른 사람이었고 다른 기타연주자 였죠. 그리고 그것이 내 연주를 통해 드러난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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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play 는 어떻게 하시게 된거죠?

  90년대 초에 난 내 솔로 활동을 계속 하고 있었어요. Kid Gloves와 Renegade Gentleman 란 앨범을 냈는데 둘 다 적당히 성공을 거두었죠. 그런데 96년에 대단한 피아니스트인 Bob James에게서 연락을 받았어요. 그는 Fourplay에 참여해서 Nathan East 와 Harvey Manson 과 같이 연주하지 않겠냐고 묻더군요. "물론이죠. 우리 언제 시작하죠?" 라는 대답을 하기까지는 3초밖에 안걸렸어요. 다시 한번 내 삶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줄 일이 생긴 거였죠. 난 3명의 세계적인 뮤지션들 - 그룹활동과는 별도로 그들의 존경받는 솔로활동들을 계속하고 있던 - 과 연주를 하기 위해 갔지요.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솔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그래미에도 후보로 올랐었어요.  


확실히 당신은 Gibson ES-335로 유명합니다. 그밖에 당신의 톤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내 톤은 아주 많은 것들의 융합체입니다. 내 연주 - 내가 프레이즈를 연주하는 동안의 강약, 내가 연주하는 데 사용한 앰프, 내가 기타를 세팅한 방식, 그리고 내가 세션이나 솔로 연주를 하는 당일 나의 몸가짐 역시 영향을 미치죠. 이런 모든 것들이 내가 기타를 연주하는 순간에 톤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Steely Dan의 “Kid Charlemagne”에서 당신의 솔로는 명연주로 꼽히는데, 그 톤을 만드는 특별한 비법이 있나요?

  내가 한 세션 솔로의 90%는 같은 335 모델로 연주한 겁니다. 'Kid Charlemagne' 의 솔로도 포함해서요. 난 그냥 작은 Tweed Deluxe 앰프를 사용했어요. 내 웹사이트에 그것에 관한 비디오가 있지요. 내가 'Kid Charlemagne'의 솔로에서 사용했던 사운드는 335와 Tweed Deluxe 앰프, 그리고 뒷쪽 픽업을 톤노브를 3정도까지 낮춘 톤의 조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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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라이브 셋업은 어떤것인가요?

  난 수년동안 다른 많은 사람들과 비슷하게 했습니다. 프리앰프를 통해 나온 것에다 이펙트를 걸어주는 거죠. 그냥 단순화 시켜서 이해했어요. 스튜디오에서는 기타는 마이크를 통해 콘솔로 들어오고 스피커를 통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때 센드채널을 통해 리버브나 이펙트를 걸어주죠. 그래서 그 이펙트 걸린 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스피커에서 나옵니다. 프리앰프나 내 기타에서 바로 나가는 소리가 아니죠. 그리고 라이브에서는 모듈로 소리를 보내주는 마이크를 따로 설치를 합니다. 그리고 센드채널에서 리버브를 걸죠. 그리고 내 귀에는 그런 방식이 모든 이펙트 사운드를 더 효과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들려요. 왜냐면 난 스튜디오에서 들어버릇 했으니까요. (고로 원래 소리에 직접 효과를 주는 인서트 방식이 아니라 원래 소리는 그냥 내보내고 거기에 이펙트 걸린 소리를 섞어주는 센드 방식으로 이펙트를 건다는 말인듯. 역자 주)

  이펙팅하지 않은 기타소리가 중심에 있고 그 주변을 둘러싸는 것은 스튜디에오서처럼 이펙트들인거죠. 그리고 난 지금은 리버브만 조금 사용을 합니다. 발라드를 연주할 때는 코러스를 좀 걸지만 다른 것들은 아주 간단해요. 스톰박스(꾹꾹이)나 다른 것들은 없어요. 다시 기타와 앰프 조합으로 돌아왔죠.  


최근에 메이저 레코드사를 나와서 독자적인 레이블을 만드셨는데 그것은 어떻게 되가나요?

  17살 때 처음으로 내 선택으로 메이저 레코드사를 떠났었고 그래서 난 내가 원하는 좀 더 창의적인 것들을 할 수 있었어요. 난 지금 나의 음악적인 모든 소망들을 이뤄보려고 해요. 내 첫번째 계획은 호른 섹션과 함께 블루스 앨범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나는 Sapphire Blue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앨범의 모든 곡을 이틀만에 녹음했어요. 우리가 했던 모든 과정이 매우 열정적이고 재미있었어요. 그런 것에 대한 열정적인 정신(spirit)이 있기 때문이죠.

  내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주고 있어요. 이 시간 속에서 난 자유로우니까요. 나의 친구인 Robben Ford와 함께 했던 CD와 라이브 실황 DVD를 막 내놓았고요 다른 몇몇 멋진 프로젝트들이 진행중입니다. 우리는 내  웹사이트 (larrycarlton.com)을 전면 개편 중이고 Mr. 335 TV (mr335.tv) 를 새롭게 시작했어요. 그래서 정보와 레슨, 연주, 공연등을 더 쉽게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나의 팬들이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든 그들과 거래할 수 있는 방법들이 생겼어요.


프리미어 기타의 독자들에게 조언한마디 해주세요.

Practice what you must. Play what you love.

번역 : 전조
출처 : 프리미기타 07년 10월호
원문 : http://www.premierguitar.com/Magazine/Issue/2007/Oct/Chattin_with_Mr_335.asp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