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픽업의 본좌, 시모어 던컨 (Seymour Duncan)

2009. 1. 30. 18:16음악 활동

  오늘 첫 인터뷰 번역의 주인공은 바로 픽업의 본좌, 시모어 던컨(Seymour Duncan)입니다. 영문으로는 'pickup king'으로 되어 있던데 '왕'보다는 왠지 '본좌'라는 어감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 유명한 던컨 픽업의 사장님이죠. 저도 개인적으로 픽업에 관심이 많아서 던컨씨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많았는데 마침 프리미어 기타에 인터뷰가 올라왔길래 번역을 올려봅니다. (저의 영어 실력은 하찮은 수준이기에 오역이 많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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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좌, 시모어 던컨^^>


  인터뷰의 내용은 픽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시모어 던컨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의 유년 시절과 전설적인 픽업 개발자인 세스 러버 (Seth Lover, 험버커 픽업의 개발자)와의 인연. 그리고 당대의 유명한 기타리스트들과 있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전형적인 아저씨들의 이야기가 그렇듯.. 질문을 하면 그냥 자기가 생각나는 거 이야기를 하십니다. 마치 김흥국씨를 연상시키는..ㅋㅋ. 그럼 도움이 되시길..

- 어떻게 픽업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내가 12-3살 쯤이었지요. 친구 중 하나가 내 기타하나를 빌려갔었어요. 56년도 텔레캐스터였죠. 근데 그녀석들에게 기타를 받고 보니 1번줄이 픽업 밑으로 박혀 버렸더라고요. 기타줄이 코일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있었어요. 그래서 픽업이 작동을 하지 않았죠. 난 그날 밤 결국 리듬픽업만 가지고 연주를 하며 놀아야 했어요.
  그 다음주 학교에가서 생물 시간에 픽업을 해부보았죠. 그때 난 현미경과 핀셋과 그밖에 다른 도구들이 있었거든요. 문제가 뭐인지 알기 위해서 코일들과 왁스 조각들을 다 분해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망가져버렸죠.
  픽업이 완전히 맛이가서 코일 풀기를 끝내려고 하는데 마침 우리 매형이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날 도와줬어요. 그가 필라델피아에서 42게이지 에나멜 선을 구해다 주었고 난 다시 코일을 감기 시작했죠. 내 첫번째 코일 머신은 레코드 플레이어 였는데 그 위에 나무조각을 고정시키고 그위에 텔레 픽업을 올려놓고 작업을 했죠. (역자 주 : 코일을 감을 때 회전기가 필요하죠. LP 플레이어를 회전기로 썼다는 이야기)

  그 시절 난  New Jersey의 Ocean City에 있는 Tony Mart's 에서 밴드와 공연을 했었어요. (나중에 'Hawks' 라고 알려진, 결국 밥 딜런과 함께하는 밴드가 된) 그 때 기타리스트인 Robbie Robertson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말했죠. '아마도 내 픽업 사운드가 더 두터울거야. 내 것이 니 것 보다 더 감았거든.' 그때 난 그가 말한 것에 대해 막연한 생각밖에 없었죠. 그땐 픽업에 대해 아는게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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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s Paul씨가 당신의 삶의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던데?

  네, 제 삼촌이 30-40년대 밴드의 리더였던 Fred Warning과 Paul Whiteman 을 알았죠. 삼촌이 내가 기타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날 데리고 Les Paul과 Mary Ford를 보러 Atlantic City에 갔었어요. 난 쇼가 끝나고 무대 뒤로 가서 Les의 분쇄기(기타를 일컬음?)와 그의 기타에 있던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었지요. 난 Les에게 픽업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동작하는 것인지를 물어봤었고 Les가 대답해줬어요.
  후에 그가 라디오 쇼에 출연해서 나와 만났던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당시 꼬마였던 나와 이야기 했던 것 그리고 지금 내가 기타 픽업일을 한다는 것을 말이죠. 난 내 직원들에게 그 라디오 내용이 담긴 테이프를 들려주었습니다.


- 그래서 당신 자신을 위해 픽업을 만들기 시작한건가요?

  그렇죠. 그때는 내 기타들을 위해서였어요. 몇년이 흘러 내가 16-7살때 쯤, 나는 내 기계를 가지고 픽업을 감고 오래된 기타들을 수리해서 다시 팔았어요. 그때 내가 57년도 스트랫을 35달러에 팔았죠! 난 그게 오늘날 이렇게 귀한 기타가 될줄 상상도 못했어요. 난 12대나 수리해서 다시 팔았었는데..
  그 당시  New Jersey의 Vineland에 Landis Music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난 학교가 끝나면 거길 가곤했지요. 거기 뒤에 있는 창고에는 부서지거나 사람들이 교환해가고 남은  오래된 스트랫이나 텔레들이 잔뜩 있었어요  난 여러 픽업과 부품들을 모으곤 했지요. 토요일 우후엔 자전거를 타고 가서 쓰레기 속에서 기타를 찾곤 했어요. 그런게 가능했다는 것이 참 좋았던 시절이었죠.
  그런 경험으로 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나는 8곳의 grammer school과 4곳의 high school, 2곳의 sub-university와 사진학교를 다녔어요. 옮길 때마다 동네의 새로운 일원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였죠. 하지만 16-7살 이던 그시절 나는 항상 그 동네에 새로 온 기타연주자로 알려졌어요. 그래서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면서도 기타 덕분에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지 않았어요. 한번 밴드에 있게되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가 매우 쉬워지죠. 그래서 내 첫고객 중 일부는 사우스 저지의 밴드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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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한 악기들의 가치를 알게 된 것도 수리하는 일을 통해서 였나요?

   음.. 내가 New jersey에서 Cincinnati로 옮겼을 때 나는 Dodd music center라는 데서 수리일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Ohio주  Norwood에 Hughes music이라는 또 하나의 가게가 있었어요 나는 거기 있는 수 많은 옛 기타들의 구성품들을 보면서 한번은 Hughes씨에게  물어봤었죠. 이많은 메일플 텔레 와 프리시전 베이스 넥으로 뭘 할거냐고. 그는 그중에 하나를 쥐더니 톱날을 켜서 넥을 서너조각으로 자르더군요.그는 그것들을 장작으로 썼어요.  거기에는 보증품용 넥들이 많았는데 왜냐면 (사용하다보면) 지판의 피니쉬가 벗겨져 나가기 때문이었어요.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로즈우드로 된 새 넥으로 바꿔가곤 했지요. Hughes씨는 수백개의 넥을 가지고 있었어요. 아주 벽을 이루고 있었죠. 나는 신품 텔레들이 있었는데 그는 새 것들을 좋아했어요.반면에 나는 옛날 것들을 좋아했죠. 그래서 우린 서로 바꾸곤 했죠.

  모든 부속이 53년도 본품인 텔레가 있었는데 시리얼 넘버가 1835 였죠. 16살 시절난 이미 빈티지 악기들에 매우 관심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당신은 꽤 비싼 가격에 그런 것들을 구할 수도 있죠.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어요. 옛 기타들은 뭔가 나에게 특별하게 느껴지는게 있어요.

  난 Roy Buchanan이 그가 낸시(Nancy)라고 부르던 53년도 텔레로 연주하는 것을 보았었죠. 난 그 소리를 너무 사랑했어요. 그때 Fendermen 이라는 밴드가 있었는데 그사람들은 언제나 블론디 텔레와 스트랫, 프리시전 베이스로 연주를 했어요. 그사람들이 내가 처음 보았던 옛 기타로만 가지고 연주를 하던 밴드였어요.


그 레코드 플레이어 이후..초기에 픽업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내 첫 픽업은 기본적인 싱글 코일 픽업이었어요. 한번에 하나씩 각각의 픽업과 판판한 조각들을 깎아내야 했죠. 난 또 홈을 파는 공구를 만들었어요. 그걸로 홈을 파내고 드릴로 구멍을 뚫었죠. 그렇게 돈을 좀 벌고 나서는 Roper-Whitney 펀치를 사서 폴피스를 정렬해서 고정시켜놓은뒤 펀치로 구멍을 냈죠. 보빈들에 구멍을 엄청나게 뚫었었죠.
 

시모어 던컨 회사의 공식적인 첫 픽업은 뭐였나요?

  음, 사실 내 첫번째 제품은 텔레 픽가드와 동으로 된 텔레 브릿지 그리고 노브와 다른 것들 이었어요. 첫번째 픽업은 SSL-1이였죠. Nashville에서 빈티지한 스타일의 픽업을 찾고있던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요청을 했어요. 당시에는 그런것들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난 SSL-1과 STL-1(첫번째 텔레픽업)을 만들기 시작했죠. 76년말 77년초 쯤에는 Duo sonic과 재즈베이스, 프리시전 베이스들을 위한 픽업을 만들고 있었어요.

 우리는 깁슨의 원본 주조기(molder)에서 험버커 주물을 얻을수 있었고 우리의 첫 몰딩된 험범커를 만들 수 있었죠.( 해석 불확실..용어의 뜻을 모르다보니..)


깁슨의 주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던 것처럼 당신의 삶에는 일렉 기타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들이 있는데 그것들에 대해 더 이야기 해줄수 있나요?

  난 Seth Lover 에게서 받은 픽업이 몇개 있었어요. 그것들은 주 생산된 픽업들의 초기 실험모델이었는데, 아마도 54-5년도쯤에 만들었던 걸거에요. 그것들은 당시 커스텀 레스폴 모델의 넥픽업으로 쓰였던 것인데 그 레스폴 이름이 black beauty나 fretless wonder 였을 꺼에요.

  그리고 그때 그것들은 나에게 성배와 같은 존재였죠. 그건 사실상 깁슨을 대표하는 픽업이었으니까요. 세스가 죽기 전에 나에게 주었죠. 그때 그가 쇼핑백 같은거에 담아 왔죠. 마치 p90의 모서리를 접어놓은듯한 형태였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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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h Lover와..>

소리는 들어보셨나요?

  그럼요. 들어봤죠. 매우 밝은(혹은 선명한, 'bright') 소리가 나죠. 그렇지만 그건 폴의 구조 때문이었죠. 조절가능한 폴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Seth가 가지고 있던 것 중에 박스 안에 들어있던 다른 하나는 PAF 58-9 더블 크림 모델이었어요. 그건 참 아름다웠죠. 그건 오래된 낙산염으로부터 만들어진 거였는데 그게 어떤 특정한 낙산염이 필요한거죠. 그치만 난 그것의 원료나 제조온도, 낙산염의 등급같은 만들 때 필요한 정보를 다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재생산을 할 때 이용했죠.


Seth와는 어떻게 친구가 되었나요?

  난 내 파트너(부인??) Cathy Carter Duncan과 K and D의 Phil Kubicki와 함께 NAMM 쇼에 참가하고 있었어요. Phil은 매우 유능한 디자이너이자 장인이었고 매우 아름다운 악기들을 만들었죠. 우리는 우리 픽업을 장착한 K and D기타를 76년 당시 쇼에 전시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회사는 막 시작하는 단계였고 여전히 픽업 다시 감는걸 하고 있었죠. 그때 누가 우리에게로 와서 명함을 내밀더군요. 그는 스스로를 Seth Lover라고 소개했어요. 험버커를 발명한 바로 그 사람..

  Lover는 모두를 위한 기준을 만들어낸 사람이었죠. 우리는 금새 친구가 되었어요. 몇년후 California의 Garden Grove에 있는 그의 동네에 가게 되었죠. 우린 둘 다 HAM라디오에 빠져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걸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가끔 주파수가 마주치기도 했고 일본 뿐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아주 좋았죠.

  우리가 식당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면 그의 부인이 차와 비스킷을 내어왔죠. Seth는 앰프에 관한 오래된 기사들과 그가 만든 픽업의 초기모델을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그가 55년 PAF 험버커에 쓰인 진짜 픽업을 보여줬어요. 지금은 모든 기타에 쓰이는 가장 최고의 픽업이 되버린 픽업의 시작을 보았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죠.

  난 그가 나를 그의 창고와 가게로 데려갈 때마다 뿌듯했어요. 난 작업대 위에서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지만 그는 모든게 다 어디있는지 알고 있었죠. 그는 많은 박스와 그가 펜더와 일할때 얻은 펜더 부품으로 가득찬 서랍. 그리고 다른 통에는 깁슨의 모든 부품들이 들어있었어요. 그는 이것저것 나에게 줬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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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Paul과 함께..> 

픽업에 대한 정보들은 어떻게 얻은거죠? 낙산염에 관한 거라든지 픽업의 핵심기술 같은거.. 세스에게 직접 들었나요?

  그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얼마 전에 그는 나에게 줄 노트가 있다고 하더니 나에게 그가 그린 모든 설계들과 구상들이 담긴 노트를 줬어요. 난 그가 초기 실험작들을 만들 때 썼던 여러 플라스틱에 대한 자료를 다 가지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할일이죠. 언젠가 이 노트와 그 안에 담긴 멋진 이야기들을 함께 담아 출판을 할 생각이에요. 그안에 설계도 등등 해서 모두. 나는 그가 나를 이 역사를 이어나갈 사람으로 생각해줬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나는 그가 52-53년도 깁슨에서 일하던 시절 썼을 때 것을 다신 만든 진품 와인더(픽업 코일을 감는 기계)도 가지고 있어요. 그건 그가 초기 견본을 만들거나 실험을 할 때 썼었던 작은 수동 와인더죠. 그는 핸드 와인더로 초기모델들을 만들었었어요. 결국 그것들은 다 기계로 생산되지만. 그는 그 전설적인 PAF 픽업을 포함해서 모든 견본들을 이 수동 와인더로 만들었죠. 작년 NAMM쇼에서는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는 Doc Kaufman이 K&F 픽업에서 작업할 때 썼다는 Leo Fender의 진품 와인더를 줬어요

  우리 회사는 우리가 Seth와 관련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요. 나는 그가 우리가 만든 제품들의 엔도서들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죠. 그는 그의 허가 도장을 우리 제품 위에 찍어줬어요. 우리가 어떻게 만드는지..생산 기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모든 부품을 다 자체 제작한다는 것. 보빈까지. 우리는 제품들, 레이저 컷팅한 것들, 펀치 머신을 이용한 것 기타 등등에 다 도장을 찍어요. 반면에 많은 다른 픽업 제작 업체들은 재료를 외부에서 공급받은 다음 조립만 자기네가 하죠.
 

당신이 픽업을 감아준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누가 있을까요?

  난 언제나 Jeff Beck을 이야기 하지요. 72년도 내가 영국에 있을 때였죠. 난 TeleGib이란 기타를 만들었었죠. 그게(그 기타에 있는게) 내 첫번째 JB 모델과 JM 모델이죠. 브릿지 픽업은 Beck을 위해 JB라고 했고 넥은 영화 American Graffiti에 나온 John Milner를 위헤 JM이라고 했어요.(그는 노란 스포츠카를 가지고 해리슨 포드와 경주를 했었죠.) 이건 내가 본격적으로 픽업을 생산하기 전에 것들이에요. 이것들은 내가 만든 것들을 다시 감은 거였죠.

  난 TeleGib을 Jeff에게 주었고 그는 그걸 beck bogert & appice 시절의 마지막 날들에 사용했죠. 그 다음에 Blow by blow 앨범에 사용을 했어요. 난 Roy Buchanan과 Jeff Beck을 소개시켜줄 기회가 생겼죠. 그리고 그건 나에게 매우 기쁜 일이었어요. 왜냐면 그 두사람은 내 삶을 통틀어 제일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였으니까요

  Beck이 Buchanan에게 바친 Stevie wonder의 커버곡 Cause We've Ended As Lovers (Bolw by blow앨범) 가 있다는 건 멋진 일이죠. 그리고 나중에 Roy도 Beck에게 곡을 선사하죠. 난 Roy Buchanan을 보면서 자랐아요. 그와 아는 사이라는 건 정말 엄청난 행운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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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Beck, Seymour, Don Felder & Billy Gibbons>


당신의 작품을 가지고 당신이 좋아하는 기타리스트들이 전설적인 곡을 만든다는 것은 정말 기분좋은 일이겠어요.

  내 생각엔 어차피 그들의 재능이지만, 그 기량과 그들의 연주를 더욱 그들답게 해주는 톤이 중요한 거 같에요. Jeff가 TeleGib을 가지고 연주를 할 때 그 소리가 얼마나 맛깔나던지. 정말 좋았죠.

  난 Michael Sembello가 Maniac을 작업할 때 스택 픽업의 초기모델을 만들어 줬죠. Buzzy Feiten이 Full Moon을 작업할 때도 함께 했고요. 초창기의 Santana와도 일했었고 Eric Johnson과도 같이 작업했었죠.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중에 하나죠. 또 James Burton과도 일했어요. 영국에 있을 땐 Gold Earring 에게도 픽업을 감아줬고 그들은 나중에 Radar Love를 작업할 때 썼죠. 유명한 기타인 Eric Clapton의 Blackie의 넥픽업도 내가 만들었지요.


그 뮤지션들의 픽업 성능이 떨어지면 다시 감아주고 하셨나요?

  네, 픽업은 노출되어 있는 폴을 통해 습기가 차면 망가져버리죠. 난 그걸 ICPC(내부 코일 폴 부식) 라고 불러요. 코일이 녹슬고 마그넷 와이어의 절연 효과가 사라지면 그럴 수 있죠. 아마 왁스를 입히지 않았던 예전 60년대 텔레의 픽업을 꺼내 코일을 풀어보면 그 폴 주의에 많은 녹이 슬어있음을 볼 수 있을거에요. 왜냐면 철금속은 다 녹슬게 되어있으니까. 그것이 오래된 라커나 왁스를 사용하는 이유죠. 습기가 차는 것을 막아주니까요.

  내가 가장 그리운 시절은 Jimi Hendrix를 위해서 한다발의 오래된 스트랫 픽업들을 다시 감아주던 때에요. 난 그걸 Roger Mayer(유명한 엔지니어)에게 줬고 그친구가 지미의 하얀색 스트랫에 다시 장착했죠. 68년 인가에.. 정확히 두세트의 픽업을 감아줬을거에요. Jimi가 고리로 장식된 검은색 챙 모자를 쓰고 활동하던 사진을 볼 수 있을텐데 그때가 내가 같이 일하던 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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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는게 생각났는데 그 시절 Jimi가 62년인간 63년산 재즈마스터를 샀었어요. 우리는 그걸 들고 함께 사진을 찍었죠. 2년전인가..전화를 한통받았는데 Steven Segal이 전화를 해서 그가 Hendrix 가족에게서 산 기타가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아냐고 묻더군요. 그게 그 재즈마스터였던거죠. Steven은 확인을 받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측근 한명과 찾아왔죠. 난 한눈에 벌써 그게 Jimi의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사진들과 대조해보고 확실하다는 확인을 해줬죠.

  다시 Cincinnati적 이야길 하자면, 난 Mug 클럽이라는 곳에서 연주를 하고 잇었는데 어떤 사내 하나가 내옆에 와서 앉더라고. 내가 알기로 우리는 Cincinnati에서 유일하게 Yardbird의 노래를 연주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친구가 바로 Joe Walsh죠(Eagles,호텔 켈리포니아의). 그때가 그가 James Gang에 들어가기 바로 전이었죠. 우리는 거기서 나와 연주를 했고 그 후로 친구가 되었죠. 그친구 때문에 내가 HAM 라디오에 흥미를 갖게 됐었죠.

나한테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였다는 것이 큰 삶의 낙이였고 그들과 함께 일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번역 : 전조
원문 : http://www.premierguitar.com/Magazine/Issue/2008/Aug/Seymour_On_Seymour.asp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