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영화] 토탈 이클립스 (Total Eclipse), 1995 : 안녕, 랭보.

J-Two 2009. 10. 5. 21:05
  대학교 1~2 학년 때 쯤.. 그러니까 이십대가 막 시작되었던 그때 쯤에 나는 랭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인터넷을 뒤지던 책을 뒤지던 언제나 희미한 사진 속의 앳된 소년으로 남아있는 천재시인. 그는 내게 불멸의 젊음과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감성을 가진 존재였으며 나는 그런 랭보처럼 살고 싶었다. 이미 십대는 지나가버렸지만 이십대에서라도 전무후무한 작품을 남겨두고 홀연히 세상을 떠나면 멋지지 않을까 싶었다.  

  도서관에서 랭보의 시집을 빌려다가 열심히 읽어보려했지만 조금 읽다가 이내 관두고 말았다. 시를 제대로 번역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 혹은 쓸 데 없는 일 중 하나다. 한글로 번역된 랭보의 시는 글이긴 했으나 시는 아니었다. 불어공부가 아무리 힘들어도 랭보의 시를 읽고 감동받을 수 있다면 한 번 해볼만한 거라고 말했던 선배형의 말에 공감했다.

  그렇게 랭보의 흔적을 쫓다가 토탈 이클립스를 알게 되었다. 디카프리오가 그냥 천재로만 나와도 멋질텐데 랭보를 연기한다니 얼마나 멋진가. 그래서 작정하고 영화를 보았다. 그때 당시의 느낌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정말 가슴에 무언가 쿵 하고 얹어놓은 느낌이었다. 마지막에 랭보가 깃발을 들고 바다로 걸어가는 장면에서 정말 뭉클했었다. (사실 경치가 좀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좀 더 황량하고 탁 트인 바다였으면 어땠을까..)

  그 번역된 시를 읽은 것이 토탈 이클립스를 보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영화의 곳곳에는 시에 나오는 표현과 심상들을 차용한 이미지와 대사가 나왔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죽은 병사, 하얀 사막, 검은 숲, 마지막 장면의 바다 등등.. 랭보의 글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그림과 영화의 영상을 비교하면서 볼 수 있었던 것, 이 영화에서 좋았던 점 중에 하나이다. 이 영화를 보고 이해 안 된다고 재미없다고 하는 부류 중에 상당 수는 아마도 그의 시를 읽지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랭보에 빠져 지냈던 시절도 잠시, 어느덧 군대에 가고 나이를 먹으며 삶의 파도에 정신을 잃으면서 나는 랭보를 스무살 언저리에 놔둔채 떠내려가고 말았다.
 
...

  그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수년이 흘렀다. 그리고 난 어제 다시 토탈 이클립스를 보았다. 멋진 문장 좀 써보겠다고 하루 종일 책상에 붙어있었으나 별다른 수확이 없던 하루였다. 무언가 나에게 영감을 줄 만한 것이 필요했다. 컴퓨터를 켜고 영화 볼만한 것이 뭐 없나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토탈 이클립스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다시 볼까 하고 틀었으나 결국 멈출 수가 없었다. 여전히 디카프리오와 데이빗 듈리스는 랭보와 베를렌느 그 자체였고 작픔과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몸부림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다로 가는 마지막 랭보의 발걸음은 역시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예전과 달라진 것도 있었다. 내가 열광했던 랭보의 그 광기가 이제는 순간순간 철없음으로도 보인다는 놀라우면서도 전혀 놀랍지 않은 사실이었다. 내가 시간을 따라간 사이 랭보는 애가 되어있었다. 사실은 내가 무뎌지고 굳어진 거였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슬펐다. 늘 랭보 같기를 바랬지만 지금의 나는 영화 속의 베를렌느 처럼 녹슬어버린 영감의 소유자가 아닐까 싶었다. (베를렌느, 영화 속에서는 매우 무기력한 인물처럼 나오지만 사실 그도 대시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했건만 벌써 시들어가는 걸까. 그러나 사실 랭보의 빛나던 광기도 결국 시들어 버리긴 했다. 생각해보면 일찍 만개했던 만큼이나 그는 빨리 저벼렸다. 실제 그의 삶을 완벽히 알지는 못하지만 절필을 한 후 그의 삶은 그렇게 빛나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요절한 천재. 어쩌면 처음부터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어릴 적에는 그런 것들이 좋아보였지만 지금은 그다지 미련이 없다. 그렇게 불꽃같이 피어나는 것도 멋지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것도 멋지다는걸 아니까. 사실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랭보의 삶이 아니라 디카프리오의 얼굴인건가..

  그래 어쩌면 이렇게 내게 다시 영감을 던져주려고 너를 다시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나의 시대를 계속 살아야 하니까.

안녕, 랭보.

덧1.

  살짝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토탈 이클립스 덕에 다시금 랭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있다. 몇년의 시간이 흐른 사이 내가 못보았던 책들이 새로 나왔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깨닫고 있다. 랭보에 대해서 정말 아는 것도 없으면서 천재니 안녕이니 말을 했다는 것을. 너무 부끄러워서 글을 다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이 어리석음도 다 나의 과정이니 남겨두어야 겠다. 처음 말하려했던 Good bye에서 이제는 Hello가 되었다. 랭보의 삶에 대한 평가를 쓸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