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의 지혜

맥북 프로 수리 후기 - 직접 수리하는 홍대 애플병원

J-Two 2019. 5. 22. 10:26

(스압 주의. 공인업체 갔다가 너무 비싸서 우연히 찾은 홍대 애플병원에서 빠르고 확실하게 잘 고쳤다는 해피엔딩 + A/S 한 번. 물론 맡길지 말지는 자세한 내용 보고 각자 판단하세요.)

어제 갑자기 내 반려랩탑(?)인 맥북 프로가 (2012년) 켜지지가 않았다. 처음사서 내가 스스로 업그레이드도 시키고 자전거 타다가 같이 굴러서 모서리가 찍히기도 한 사연 많은 녀석이다. 이제는 너무 무거워서 집에다가 두고 데스크탑처럼 쓰고 있지만 아직도 쌩쌩하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없이 썼는데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완전 먹통이 된거였다.

일단 증상을 보니 전원쪽 문제로 보였다. 충전기(맥세이프 1세대)를 물리면 연결단자에 불이 들어와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본체가 다 방전되서 동작이 안되는 건 확실해보이니 우선은 충전기 문제인지 본체 문제인지를 확인했다. 집에서 놀고 있는 맥북 에어에 충전기를 물려봤는데 충전이 잘됐다. 이런..사실 충전기 문제이기를 바랐는데 본체 문제인 것이 확실했다. 돈 좀 깨지갰구나 하는 각오를 했다.

아이폰 수리를 할 때 들렸던 홍대 대우전자 서비스 센터로 갔다. 나는 기본적으로 비싸도 공인업체에서 수리를 받으려고 하는데 부품의 아주 사소한 차이라도 사용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케이블은 늘 정품을 쓰는데, 케이블 비싸다고 애플 욕하는 사람들 많지만 음향쪽 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케이블의 중요성과 정밀도를 잘 알기에 그정도 가격은 충분히 지불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서 파는 싸구려 케이블 몇번 끼워봤는데 규격이 잘 안맞아 뻑뻑하게 들어가며 아이폰 단자가 상하는 느낌이 확 든다. 몇천원 아끼려다가 100만원짜리 장비를 망가트릴 순 없다.

"60만 천원입니다."

네? 순간 귀를 의심했으나 정말 60만원 더하기 천원이었다. 잠시 안에 들어가서 검사를 마친 담당자가 잠시 주저 하더니 메인보드 교체 비용을 알려줬다. 확실히 전원부쪽 문제 같은데 맥북은 부품별로 수리가 안되서 메인보드를 통째로 갈아야 한단다. 사실 통으로 교체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2012년 모델이면 지금 중고로 사도 60만원 정도일텐데, 왜 구형 모델 수리비가 이렇게 비싼가 물어봤더니 모델에 상관없이 메인보드 교체 비용은 동일하다고 알려줬다. 아 이런 애플 이 ㅆ@$#$%#$^%#$%&!!! 쿡이형 나와!

센터를 나와 이성을 찾고 생각해봤다. 분명 사설업체는 좀 더 싸긴 할텐데. 하지만 이미 한 번 실패의 경험이 있었다. 전에 충전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충전기 전문 사설 업체에 수리를 맡겼었는데, 케이블 쪽이 문제여서 기존 케이블을 떼어내고 새 케이블로 갈았었다. 근데 딱 봐도 중국산 싸구려인 새 케이블은 금방 다시 망가져서 결국 충전기 정품으로 새로 하나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열받는다.

길가에 서서 고민을 했지만 60만원은 너무 큰 돈이었다. 비록 아끼는 랩탑이기는 하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난 제품이고 중고로 팔 것도 아니므로 그냥 적당히 고쳐서 조금이라도 더 쓰는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앱등이의 정품 고수 철학은 잠시 잊기로 했다. 형이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깨끗한 메인보드로 다시 갈아줄게!!ㅠㅠ 

구글로 얼른 찾아보니 근처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 지하에 사설업체가 있는 걸로 나왔다. 고민할 거 없이 바로 걸음을 옮겼다. 아파트 단지 밑에 보니 애플 수리 센터 간판이 보였다. 입구로 들어가 두리번 거리며 제일 안쪽까지 들어가니 수리센터가 있었다. 근데 가게 외관이 생각보다 훨씬 낡아보였다. 애플 수리센터들은 보통 다 세련된 인테리어가 특징인데 여기는 약간 옛날 부동산 느낌? 뭐지?

일단 들어가니 더 놀랐다. 앞에 담당자 두 분이 앉아 계시는데 딱 봐도 60대 이상인 머리가 새하얀 어르신이었다. 다가가 보니 두 분 다 눈앞에서 바로 맥북과 다른 장비를 열심히 수리하고 계셨다. 요즘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보는 전파상의 모습이었다. 근데 난 추억 찾으러 온게 아닌데? 뭐 고치러 왔냐고 해서 맥북이라고 하고 접수증에 여전히 머뭇거리며 글씨를 적는데, 안쪽에서 한 분이(이분도 어른) 더 나오시더니 바로 검사해준신다고 하고 맥북을 받아가셨다.   

대기 의자에 앉아서 다시 검색화면을 봤는데, 내가 찾았던 곳은 이름이 '애플 인사이드' 였는데 여기는 '애플 홍대병원'이었다. 헉. 이거 뭐야. 속은건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주변을 봤는데 우선 나보다 먼저 온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옆 바닥에는 수리를 마친 듯 보이는 아이맥이 몇 대 있었다. 못 믿을 정도는 아니었다. 벽에 안내를 보니 9년째 영업중이라고 써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기술자격증도 보였다. 흠..

사실 나는 이런 풍경에 익숙하다.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바로 회로 만들고 고치는 엔지니어다. 그래서 이런 재래식 수리의 장단점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오실로스코프같은 장비로 기판을 추적해가며 문제 부품을 찾고, 같은 부품이 없으면 비슷한 부품을 써서라도 어떻게든 고쳐내는게 이쪽 기술이다. 다만 이 방식은 옛날처럼 손으로 기판 조립하던 시절에는 정석이었지만, 요즘처럼 기계가 초소형 부품으로 찍어서 만드는 기판들은 부품이 너무 작고 밀도가 높아서 손으로 고치는게 불가능한 수준이 되고 있다. 과연 나의 맥북은 살아날 수 있을까?

이거 배터리가 죽었어요. 배터리만 갈면 되겠네.
아 그래요? 얼마나 들까요?
11만원.
아...네, 잠시만요.

가격을 듣고 기쁘기도 했으나 여전히 의심도 남아있었다. 공인센터 담당자는 메인보드 갈자고 했는데 배터리 문제였단말인가? 누구 말이 맞는건지. 잠시 증상을 돌이켜 생각해봤다. 충전기를 꽂았을 때 처음에는 LED에 녹색불이 들어오지만 2-3분 지나면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꺼지는 증상이었다. 충전기 내 콘덴서에 있던 전류가 전혀 흐르지 못하고 서서히 방전되는 증상으로 보였다. 본체로 전기가 흘러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맥 본체는 큰 충격을 받거나 뭐가 들어가지도 않았고 충전단자도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아직 싸이클 1000회가 다 되지는 않았지만 배터리가 죽었을 확률이 커 보였다. 

네 배터리 갈아주세요. 언제 찾으러 오면 될까요?
아 이거 5분이면 돼요.

5분이라니. 정말 좀 기다렸더니 멀쩡해진 맥북이 다시 돌아왔다. 사설업체 첫 경험은 잘 끝났다. 아저씨는 수리된 맥북을 보여주며 다른 데 가서 못고치는 거 여기서 고쳐준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얘길 하셨다. 방근 나간 사람도 다른 데서 못고친 거 여기서 고쳐서 갔다고.. 돈은 계좌이체로 지불했다. 옛날 가게가 종종 그렇듯 여기도 카드는 10% 부가세가 더 붙는다. 11만원이 현금가 라는게 좀 걸렸지만 60만원에서 11만원으로 줄었는데 이정도야.

집에 와서 애플병원 블로그를 찾아보니 역시 예상대로 빛나는 재래식 수리의 성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머리카락 굵기의 전선으로 부품을 연결하는 건 정말 어렵다. 특히 땜질은 조금만 열관리를 못하면 부품이 타버린다. 이분들은 확실히 장인이다. 다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수리가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점점 회로들이 하나의 단일 칩으로 설계되어 나오는 상황이니. (애플워치가 그렇다.) 어쨌든 가까운 곳에 이런 분들이 계시다니 참 다행이다. 이런 식의 즉석 수리를 얼마만에 경험한건지.

정리를 해보자면 나는 구형 맥북이고 중고로 팔 생각이 없었기에 사설수리로 갔다. 만약 신형맥북이었다면 안 그랬을 거 같다. 애플병원은 겉은 좀 낡아보여도 탁월한 기술자들이 책임지고 고쳐주는 곳이다. 물론 장인 아저씨들에게 교육받은 친절 매뉴얼을 기대하지는 말자. 우리 맥북이가 건강하게 남은 생 잘 살기를 바라며 마무리!  

이틀 후 후기 추가

맥북을 가지고 와서 잘 쓰고 있는데, 어째 내장 스피커 사운드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음악을 틀어서 확인해보니 확실히 중저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배터리를 갈다가 스피커가 망가진건가?' 불안한 마음에 얼른 다시 맥북을 챙겨 애플병원으로 갔다. 가는 길에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도착해서 증세를 설명했더니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듯 배터리는 스피커와 상관이 없다고 열어서 내부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원래 스피커가 오래되면 내부 재료가 찢어지는 일이 생긴다고 하며.

어 이게 왜 빠져있지? 

밑판을 열자마자 냉각팬 옆에 케이블이 하나 빠져있는 게 보였는데, 그게 바로 스피커 케이블이었다. 바로 수리 끝. 아저씨가 조립하다가 케이블 연결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거다. 당연히 비용은 없고 미안하다는 사과도 들었다. (그렇지만 내 버스비와 시간은..?) 아쉽지만 장인 신뢰도 5% 하락.